[출처: Getty Images]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퇴진하기 전까지 잔인한 폭정으로 악명높았다
[출처: Getty Images]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퇴진하기 전까지 잔인한 폭정으로 악명높았다

산티아고 마텔라는 22살이던 1977년 어느 날 농구를 하던 와중 갑자기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필리핀의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1972년 9월 21일 계엄령을 선포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한 후 야당 의원들을 체포했다. 마텔라는 10년간 이어진 계엄령 기간 구금되고 고문당한 피해자 수만 명 중 한 명이다.

50년이 지난 지금 마텔라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내는 것에 두렵지 않다. 마텔라는 필리핀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계엄령 사태에 관한 진실이 왜곡되는 게 더 두렵다고 했다.

당시 체포된 마텔라는 3달간 고문당했다. 나체로 얼음에 묶인 적도 있다. 그를 체포해간 사람들은 마텔라에게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마텔라는 ‘공산주의자’가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출처: BBC] 산티아고 마텔라를 포함해 계엄령 당시 수만 명이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출처: BBC] 산티아고 마텔라를 포함해 계엄령 당시 수만 명이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마텔라는 “계속해서 내게 집회 주동자이며 수류탄을 던졌다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나를 구타했다. ‘얀톡(방망이)을 사용해 나를 계속 구타했다”고 회상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에) 자백할 수 없는 내용을 자백하게 하려고 성기도 공격했습니다.”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9년간 약 7만 명이 투옥되고 3만4000명이 고문당했으며 32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마르코스 대통령 가족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영부인이었던 이멜다 마르코스는 구두 수백 켤레는 물론 각종 예술품과 사치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출처: Getty Images] 이멜다 마르코스의 악명 높은 구두 수집
[출처: Getty Images] 이멜다 마르코스의 악명 높은 구두 수집

역사가들은 마르코스 일가를 아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부패정치의 주범으로 지목하지만, 이들은 국고에서 수십억 달러를 빼돌린 사실이 없다며 부인한다.

폭정과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결국 1986년 ‘피플 파워’라고도 불리는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마르코스 대통령과 그 일가는 하와이로 도망쳤으며, 이후 마르코스 대통령은 망명지에서 3년 뒤 사망했다.

그런데 올해 초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가 압도적인 표 차로 대선에서 승리하며 놀랍게도 부활했다.

이러한 마르코스 일가의 이미지 개선은 계엄령 이후 태어난 필리핀 청년들을 겨냥한 SNS 작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등 청년층이 주로 사용하는 SNS 플랫폼엔 마르코스 일가가 주류 언론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포스팅이 뿌려졌다.

“봉봉” 마르코스 또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피하고 대선 토론 참여도 거부했다. 또한 과거사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다며, 대신 앞으로 필리핀을 하나로 통합하고 코로나19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딛고 국가 회복에 앞장서겠다는 약속을 강조했다.

[출처: Getty Images] 마르코스 전 대통령 부부는 부패와 실정의 대명사가 됐다
[출처: Getty Images] 마르코스 전 대통령 부부는 부패와 실정의 대명사가 됐다

이러한 메시지는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는 마텔라의 자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텔라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과거의 일은 과거로 남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텔라는 아들의 말에 화가 났다.

“아들은 (마르코스 일가의) 편입니다. 제가 하는 일이 청년층을 위한 것인지 모릅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지만, 저는 청년층에게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텔라는 “내가 겪었던 일을 그냥 묻어버릴 순 없다. 이 고통은 내 마음속 깊이 박혀 있다”고 덧붙였다.

“저는 아직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투쟁합니다.”

허위 정보 유포 및 사실 부인

한편 마르코스 대통령은 허위 정보 유포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다.

작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가 설립한 뉴스 웹사이트인 ‘래플러’에서 사실 확인을 담당하는 젬마는 허위 정보 유포를 정량화하기란 어렵다고 지적했다.

“어느 특정한 웹사이트 한 곳이나 계정 하나가 퍼뜨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정 그룹 한 곳이 퍼뜨리는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곳에서 허위 정보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페이지, 계정, 그룹 수만 곳을 포착했습니다.”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웹사이트 대부분이 공식적인 역사 안내 웹사이트처럼 보이며, 그 내용 또한 과거에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속에 거짓을 담고 있는 거죠.”

가장 널리 퍼진 허위 정보 중에는 계엄령 중 시민이 체포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젬마는 “많은 게시물이 계엄령 당시 인권 유린 실상을 부인한다”면서 “체포되고 수감된 사람들은 반군이나 범죄자 등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에 대해 BBC는 현 마르코스 행정부에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출처: Getty Images] 올해 초 대선에 당선되며 부활한 페르디난드
[출처: Getty Images] 올해 초 대선에 당선되며 부활한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한편 “봉봉” 주니어 현 필리핀 대통령 또한 올해 초 대녀의 유튜브에 출연해 자신의 아버지가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마르코스 일가는 사죄한 적 없지만, 마텔라를 포함한 희생자 1만1000여 명은 필리핀 정부로부터 국가 배상금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증언을 담은 기록물은 독립 정부기구인 ‘인권 침해 피해자 추모 위원회(HRVVMC)’ 기록 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이곳엔 번호가 붙은 상자 수십 개가 높이 쌓여 있다.

HRVVMC에선 청년들로 이뤄진 팀이 계엄령에 관한 진실을 담은 SNS 게시물 제작하고 있다.

크리스찬토 카르멜로 HRVVMC 이사는 “청년층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어두웠던 과거가 왜곡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이들은 계엄령 실상에 대한 자세한 증언을 보존하고 디지털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디지털 파일 속에는 잔인하게 고문당한 후 살해된 아들의 시신을 어머니가 어떻게 돌려받는지 담고 있다. 이 증언의 내용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과연 마르코스 현 대통령이 계엄령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박물관을 허용할까.

이에 대해 카르멜로 이사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기에 아량을 베풀 것이며, 국가를 통합한다는 그 약속을 진지하게 지킬 것이라고 낙관한다”고 말했다.

“올해는 필리핀 계엄령 선포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계엄령을 통해 필리핀이라는 국가가 변했으며 많은 민중의 삶이 변했습니다. 이제 대부분이 저처럼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박물관 건립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박물관은 젊은 세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곳이자 함께 협력한다면 어떤 국가나 정부를 이뤄나가고 싶은지 결정할 수 있으며, 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규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필리핀의 많은 청년들이 이에 동참하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 여행에서 필리핀 청년들은 과거를 재현하기 위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출처: BBC] 역사 여행을 통해 계엄령 희생자를 위한 기념관을 방문하는 필리핀 청년들
[출처: BBC] 역사 여행을 통해 계엄령 희생자를 위한 기념관을 방문하는 필리핀 청년들

과거 계엄령에 대한 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계엄령과 관련된 잘못된 정보가 기록된 미로에서 벗어나는 게임이다.

역사 여행에서 만난 청년들은 대부분 불과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났지만 함께 셀카를 찍으며 친해졌다. 그러면서 계엄령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에 꽃을 두며 추모했다.

역사 여행에 참여했던 한나(17)는 그날 많은 감정을 느꼈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꿈과 삶이 유린당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친구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이들에겐 엄청난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의 참상을 담은 가슴 아픈 증언이 필리핀의 집단적 기억을 이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한 모습이다.

[출처: BBC] 1965년 아버지 마르코스의 당선부터 2022년 아들 마르코스의 당선까지 담은 마르코스 일가의 타임라인
[출처: BBC] 1965년 아버지 마르코스의 당선부터 2022년 아들 마르코스의 당선까지 담은 마르코스 일가의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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