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이 입양된 직후 한국 내 미군 주택 단지에서 찍은 사진
[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이 입양된 직후 한국 내 미군 주택 단지에서 찍은 사진

밀턴 워싱턴은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왕따’를 겪은 그는 미국행을 꿈꿨고 8살 때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한국 세인트 빈센트의 고아원 밖에 멋진 차가 멈춰섰다. 밀턴은 그 순간 그의 삶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흑인 미국인 커플이 나왔어요. 남자는 군복을 입고 있었고 여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어요.”

밀턴은 그들이 자신의 친구이자 자신처럼 혼혈인 조셉을 입양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차에 올라타 모든 문을 잠궜다.

그는 자신도 데려가라며, 그렇지 않으면 차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울부짖었다.

캡틴과 부인 워싱턴 부부는 조셉과 밀턴을 모두 집으로 데려가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중 누가 그들 가족과 잘 맞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며칠 간 시간을 준 다음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동두천 미군기지의 낯선 집, 낯선 침실에 누워 어린 밀턴은 그날의 두 번째 큰 결심을 하고 달아났다.

“저는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도 그들은 저를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그는 말한다.

“저는 미국에 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주한미군


고아원에 살기 전 밀턴은 남북한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유일한 흑인이었다. 밀턴의 아버지는 오래 전에 이미 떠났지만, 어머니는 밀턴을 사랑했고 온갖 편견과 차별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밀턴의 이웃사촌 아이들은 빨간 사과, 바나나, 기차, 원숭이에 대해 노래했다. “가장 큰 소리로 불러주던 부분을 기억해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그래서 분위기가 정해졌어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 노래는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놀이터 노래였어요. 적어도 인종차별적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니였죠. 하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그것을 그의 피부색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어요.”

흑인 남성의 아들로서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가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출생증명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출처: Milton Washington] 아기 시절의 밀턴. 그는 자신의 정확한 출생 연도를 알지 못한다
[출처: Milton Washington] 아기 시절의 밀턴. 그는 자신의 정확한 출생 연도를 알지 못한다

밀턴은 그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온 미국인임을 알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미국은 도시가 금으로 만들어지고 아이스크림 산이 있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들의 땅이었다.

그는 “미국에는 흑인이 가득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는 것을 꿈꿨다”며 “이런 마법의 생명체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밀턴에게 미국은 그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환상의 나라였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진흙과 돌로 만든 오두막에서 살았고, 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강에서 옷을 빨아 입었다.

어느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문 앞에 도착해 밀턴의 어머니에게 “당신과 당신 아들 때문에 이 마을에 수치심이 가득하다”고 비난했다. 밀턴의 어머니가 항변했지만, 그들은 집을 떠나 미군 기지 근처 마을로 이사해야 했다.

그곳에는 자동차와 전기, 돈이 있었는데 모두 밀턴에게 새로운 것들이었다. 특히 소금은 그 마을의 화폐였다.

밀턴은 또한 흑인 미군들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의 아버지를 찾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을 느꼈다.


마을 인근 홍등가 골목에서는 어린 노숙자 소년들이 구걸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다른 마을 아이들과 싸웠다. 미군들은 그들을 작은 도둑들을 뜻하는 속어인 “슬리키 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섯 살짜리 밀턴이 엄마의 미국인 남자친구가 준 오레오 한 봉지를 그 소년들과 나눠 먹었을 때, 그 역시 “비열한 소년”이 되었다. 밀턴은 마침내 자신이 집단에 속해 있다고 느꼈다.

“흑인 병사들이 나에게 돈을 줬어요. 거스름돈이 아니라 달러 지폐를요. 그것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밀턴의 어머니는 마을 술집에 취직해 밤에 일을 하러 나갔다. 밀턴은 집에 혼자 남겨졌다. 엄마는 집밖에 나오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그는 무시했다.

어느 날 밤, 밀턴의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술집은 경찰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그녀와 그곳에서 일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은 2주 동안 감옥에 보내졌다.

밀턴과 친구들은 술집에서 음료를 훔치고 마을 곳곳에서 모험을 하며 날뛰었다.

그의 엄마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밀턴이 다시는 혼자 있지 않도록 확실히 했다. 그녀는 경찰의 급습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밀턴을 고아원에 두어 주 동안 데려다 주고는 했다.

밀턴은 어린 시절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아원의 다른 한국인 아이들에게 인종적으로 학대를 당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두지 않았다.

“나는 거의 웃어넘겼어요. ‘하지만 넌 고아야. 나는 엄마가 있어. 엄마는 2주 후에 나를 데릴러 올거야’ 라고 말이죠. 그리고 엄마는 항상 2주 후에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이런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밀턴과 그의 엄마는 택시를 타고 다른 고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밀턴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미국 군인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으로, 미국 아이들을 위한 세인트빈센트 집으로 불렸다.

밀턴의 엄마는 그에게 그녀가 다음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고 그에게 선물을 약속했다. 그는 기차 세트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포옹은 작별을 의미했다.

“어머니는 내게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것이 내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 모습입니다.”

[출처: BBC] 밀턴은 자신의 양어머니 그웬돌린 워싱턴과 함께 10번째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출처: BBC] 밀턴은 자신의 양어머니 그웬돌린 워싱턴과 함께 10번째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현재 50대인 밀턴은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며 “슬릭보이”라는 회고록을 쓰고 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생물학적 가족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최근 몇 년 동안 DNA 웹사이트를 통해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 2019년 4월 드디어 그의 어머니 가족과 연이 닿았다.

“안녕하세요, 시애틀에서 전화드렸습니다.” 한국어 억양이 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분은 “밀턴아”라고 생모가 자주 불렀던 이름을 사용하며 말했다.

“나는 네 누나 동이야, 나 기억하니?”

밀턴은 누이를 기억했다. 그녀는 그의 누나들 중 한 명이었고, 그들은 밀턴이 어렸을 때 한국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밀턴은 그의 이복 누나와 이야기한 것이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저는 내 과거와 내가 연결되어 있고, 그 기억들이 그녀에 의해 입증됐다는 것에 매우 흥분했어요.”

[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과 그의 누나 그리고 어머니 박영자 씨
[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과 그의 누나 그리고 어머니 박영자 씨

밀턴은 그의 어머니가 살아계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누나는 그에게 어머니가 오래 살았고, 불과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들은 1998년에 미국으로 왔고, 밀턴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밀턴의 어머니는 밀턴에게 차마 연락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밀턴의 어머니는 자신의 유품인 금과 옥 목걸이를 밀턴에게 남겼다.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그가 말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길입니다.”

[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 워싱턴은 주위 사람들이 종종 그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다고 말한다
[출처: Milton Washington] 밀턴 워싱턴은 주위 사람들이 종종 그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다고 말한다

밀턴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답을 계속 찾고 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루이지애나에서 왔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거의 없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그는 유일하게 사라진 연결고리입니다”라고 밀턴은 말한다.

여전히 느껴지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밀턴은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포기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내가 미국인의 삶에 도전한다면, 내가 잘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내 마음 속에는 항상 어떤 구멍이 존재해요. 하지만 그로 인해 현재 내 삶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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